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(당시에는 변또라 불렀다.)을
산길을 따라 마을과 백련산 정상 중간의 새재 밭에서 일을 하시는 아버님께 가져다 드렸다.
어린 시절에는 밭이 너무 멀고 또 다른 아이들과 놀려는 욕심에 가지 않겠다고 떼도 많이 쓰고 했는데,
너무 그립고 아쉬운 날들이다.
내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점심을 걸르고 물로 주린 배를 채우셨을 텐데,
어쩌다 밥을 들고 간 날이면 엄마가 싸주신 된장에 밭에 있는 깻잎, 고추로 찬을 삼아 드셨던 아버지,
그래도 아들 위해 복송(야생 복숭아), 돌배(야생 배)를 따 주셨던 아버지,
아버지 따라 밭에서 내려온 밤이면 특식으로 먹었던 라면국(삼양라면 2봉지에 김치를 넣고 물을 흥건하게 부어 일곱식구가 먹었으니)만을 고대하던 아들
아버지 배고픔은 모르고, 저 좋아하는 라면국을 기다린 철없는 아들
새재 밭에 담배, 고추, 콩을 심어 우리를 먹여 살리고, 당신께서 못배운 한을 풀고자 자식 위해
그 먼 길 무거운 지게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아버지,
그 무거운 짐에 짓눌렸을 아버지의 어깨를 한번 주물러 드리지 못하고,
알량한 성적표에 즐거워 하시던 아버지를 보며 뿌듯해 했던 철없는 아들,
당신의 어깨를 짓누른 짐에 더해 자식들 교육이라는 더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당신의 몸을 팔러 도회지로 나가는 삶을 택하신 아버지
우리집이 마을의 사실상 이농 1호였다.